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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와일드>,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 Margo Jeong
  • 2023년 4월 1일
  • 3분 분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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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영화 주인공이 있다면 바로 영화 <와일드> 속 셰릴 스트레이드가 아닐까.


영화 <와일드>는 셰릴 스트레이드의 실제 이야기를 담은 자서전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셰릴의 엄마 바비는 가정폭력을 휘두르는 남편으로부터 도망쳐 나와 홀로 두 아이를 키우면서도 늘 웃음을 잃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 엄마를 셰릴은 무척이나 답답해하면서도 누구보다 크게 사랑한다. 그러나 엄마가 이른 나이에 갑작스러운 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는 후회와 엄마에게 잘 대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은 셰릴을 쉽게 극복할 수 없는 방황으로 몰아간다. 술과 마약, 섹스 중독에서 헤어나올 수 없게 되면서 그녀는 점차 친구들과 남동생, 남편으로부터 외면당하게 된다. 스스로 더는 망가질 수 없다고 느꼈을 때, 그녀는 우연히 들른 상점에서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에 관한 안내서를 발견했고, 한 권의 책을 희망처럼 품은 채 그길로 난생처음 하이킹을 떠나기로 한다.


셰릴이 도전한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은 서부에서 가장 유명한 미국 3대 하이킹 코스 중 하나다. 총 거리가 4,000km가 훌쩍 넘고, 완주까지 4~5개월이 걸린다는 이 악명 높은 코스를 셰릴은 여자 혼자에 초보라는 큰 위험을 감수하고 무모하게 도전한다. 먹고 마실 것이 부족한 것은 물론, 변덕이 심한 날씨 때문에 능숙한 하이커들도 결코 만만치 않은 코스라지만 그녀에게 이건 문제도 아니었다. 길고 외로운 길에서 어쩌다 만나면 그저 사람이라는 것만으로도 반가워야 할 ‘남자’들은 그녀에게는 압도되는 자연이나 독을 품은 뱀보다 더 무서운 존재일 뿐이었다. 순간의 만남마다 긴장감에 눈치만 살피는 그녀의 모습은 여성 관객들이라면 치가 떨릴 장면들일 것이다.


마음 편하게 인사 한번 나눌 기회 없이 남들보다 더 고독한 길을 걸으며 셰릴은 끝없이 생각하고 과거를 정리하고 엉킨 감정을 풀어낸다. 첫날에는 무거운 배낭도 제대로 메지 못하던 그녀였지만 조금씩 스스로 할 줄 아는 것이 많아지고 점점 강해지며 더 나은 자신의 모습을 찾아간다. 마침내 셰릴은 아무도 성공하리라고 예상하지 못한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을 완주해내고, 결국 그녀를 기다려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돌아간다. 영화는 홀로 가장 고독한 여정을 견뎌낸 단단한 여성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나는 어쩐지 이걸 보며 모순적이게도 사람에게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계속해서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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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주가 아무것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극한의 상황에서 셰릴을 그토록 강하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그녀의 끈기일까, 아니면 오기일까? 셰릴이 걷는 길에는 그녀를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녀가 그 외로운 길을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사람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살면서 마주한 지금 그녀의 모습을 만들어낸 수많은 사람, 매번 방명록을 마주칠 때마다 그녀가 인용하는 작가들, 별이 뜨는 밤에 텐트 속에서 읽었던 책 속의 인물들. 대자연의 위엄이 셰릴을 고통스럽게 할 때 그녀는 그 모든 사람을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을 것이다.


셰릴을 가장 단단하게 지탱하고 있는 사람은 엄마 바비다. 엄마의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시작된 이 긴 여정 내내 셰릴은 엄마에 대한 생각을 멈추지 않는다. 아주 작고 사소한 엄마와의 사랑스러운 추억, 사춘기가 지난 후에도 계속해서 엄마에게 못되게 굴었다는 죄책감, 너무 일찍 떠나보낸 엄마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사랑. 걷고 또 걷는 내내 그녀는 엄마가 가장 좋아한 카펜터스의 노래를 흥얼거리고, 엄마에 대한 생각에 때로는 주저앉아 울기도, 때로는 아무 말 없이 감정을 삼키기도 한다. 고난에 부딪혀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그녀는 늘 웃는 얼굴이었던 엄마 바비의 말과 행동을 떠올렸다. 더는 세상에 없는 존재지만 바비는 여전히 셰릴의 마음속에 남아 그녀를 강하게 만들었다.


때때로 그녀는 방황의 시기로 인해 이혼할 수밖에 없었던 전 남편 폴을 떠올린다. 셰릴에게 남편 폴은 나약해진 순간이면 언제나 가장 먼저 기댈 수 있었던 존재였다. 고통스러운 일들을 겪고 이혼을 한 후에도 그녀에게 폴은 세상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의지가 되는 존재다. 그녀가 기댈 수 있는 또 한 명, 셰릴의 가까운 친구 에이미 역시 물심양면으로 그녀의 하이킹을 도와주지만, 셰릴이 분기점마다 전화해 자신의 안부를 전하고 위급한 상황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은 언제나 폴이다. 영화 <프란시스 하>에서의 한 대사가 생각난다. 약혼자 패치와 크게 싸우고 프란시스에게 달려온 친구 소피에게 프란시스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속상한 건, 그냥 네가 뭔가 재밌는 일이 생겼을 때 달려가서 말해줄 딱 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패치일 거라는 거야. 나는 그걸 결코 듣지 못할 거고.”


셰릴이 떠올리는 중요한 또 한 사람, 남동생과의 기억은 주로 엄마와 연결된다. 그들은 철없던 시절 엄마에게 함부로 대했다는 죄책감을 공유하고, 사랑하는 엄마를 잃었다는 상실감에 밤새 머리를 맞댄 채 울곤 했다. 방황하던 시간 동안 이제는 유일한 가족이 된 남동생과 멀어지고 말았지만, 여정이 끝날 무렵에는 용기를 내 그에게 함께 살 것을 권유할 만큼 그녀는 자기 자신을 되찾을 수 있게 되었다. 결국 홀로 걸은 긴 시간동안 그녀를 지탱해준 것은 그녀가 사랑했던, 그리고 그녀를 사랑했던 사람들이었다. 비록 그들이 함께 있지는 않았지만, 그들과 함께했던 날들의 기억은 그녀가 현재의 괴로움을 견딜 수 있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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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릴 스트레이드를 보며 사람은 과연 무엇으로 살아가는지 생각하게 된다. 혼자 걷는 동안에도 그녀의 곁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있었으며, 우리는 모두 결국 사람과의 관계 덕분에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녀가 종종 전화로 안부를 전할 곳이 없었다면 혼자였던 그 여정을 견딜 수 있었을까. 힘든 순간에 때맞춰 도움을 보내준 사람들이 없었다면 그 길을 끝까지 걸을 수 있었을까.


<와일드>를 보며 삶에 대한 나 자신의 태도를 다시 정비하게 되었다. 삶은 원래 외로운 것이고, 나의 길은 홀로 만드는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지난 오랜 시간을 반성해본다. 지독하게 외로운 길을 혼자 걸어가는 것 같아도, 둘러보면 나의 곁에는 언제나 수많은 사람이 함께 길을 걷고 있다. 지금의 내 모습은 혼자 만들어진 것이 아닌 수많은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들에게 의지하고, 때로는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삶임을 우리는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사람에겐 사람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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