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작은 아씨들>, 그 속에 숨겨진 여성 작가들의 ‘자기만의 방’
- Margo Jeong
- 2024년 3월 1일
- 7분 분량
최종 수정일: 2024년 5월 16일

소설 <작은 아씨들>은 1868년 최초로 출간된 이래 지금까지 수많은 (대부분 여성일) 독자들의 사랑을 받으며 네 편의 훌륭한 영화로 만들어졌다. 워낙 고전 소설이라 적어도 한 번은 책을 읽어보거나 영화를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겠지만, 그래도 줄거리에 관한 설명을 해보자면 주인공은 가난하지만 곧은 품성을 가진 마치(March) 집안의 둘째 조(Jo)와 그녀의 세 자매 메그(Meg), 베스(Beth), 에이미(Amy)다. 이들은 옆집 소년 로리(Laurie)와 절친한 관계를 쌓으며 자유롭고 쾌활한 어린 시절을 보내지만, 점점 자랄수록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를 겪으며 성별의 한계를 깨닫게 된다. 여성이 결코 먹고 살 만큼 풍족한 돈을 벌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조와 자매들은 사치를 경계해야 한다는 도덕적 가르침과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탈출하고 싶은 욕망을 두고 끝없이 갈등한다. 소설과 영화의 결말에는 이런 부분이 나온다. 독신으로 살고 싶어 하는 조를 못마땅해하며 ‘여자는 반드시 남자와 결혼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마치 대고모(그러나 그녀 역시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는 죽으면서 자신의 저택을 조에게 물려준다. 소설 속에서 조는 이 저택을 받아 소년들을 위한 학교를 여는데, 2019년 판 영화를 제작한 감독 그레타 거윅(Greta Gerwig)은 이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소년과 소녀 모두를 위한 학교를 여는 것으로 결말을 바꿨다. 어쨌든 영화 속에서 조는 대고모가 저택을 준 것에 대해 의아해하며 “대고모는 날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라는 말을 한다. 그 장면을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마치 대고모는 비록 조를 싫어했을지 몰라도, 자신과 가장 닮은 조카인 조를 외면할 수는 없었을 거라고. 같은 비혼 여성으로서 대고모는 혼자 힘으로 돈을 벌며 작가로 살아가고 싶은 조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아무 방해나 걱정 없이 글을 쓸 수 있는 자신이 소유한 집이었다. 버지니아 울프가 <자기만의 방>에서 말했듯, 그녀보다 100년 더 전의 조 역시 ‘자기만의 방’과 먹고살 돈 ‘500파운드’가 무엇보다 필요했던 것이다.
2019년 판 영화 <작은 아씨들> 속 조가 물려받은 마치 대고모의 저택
나는 문득 작은 아씨들 속 조나 그녀와 똑같은 삶을 살았던 저자 루이자 메이 올콧, 버지니아 울프 같은 여성 작가들이 얼마나 더 있을지 궁금해졌다. 그들이 모두 결혼을 했을지, 그들의 ‘자기만의 방’은 어떤 모습이었을지, 그들은 글을 쓰기 위해 어떤 방법으로 매달 돈 ‘500파운드’를 벌었을지 알고 싶어져 이에 대한 글을 쓰기로 결심했다.수많은 여성 작가들 가운데 내가 주로 다룬 건 작은 아씨들 영화와 관련된 작가들이다. 여전히 내가 알지 못해 후보로도 넣지 않은 여성들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최소 100년 이상의 작가들이 다수였기 때문에 조사가 쉽지는 않았지만, 처음에는 상당히 놀랐다. 이들 모두가 예상 밖으로 상당히 부유해 보이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이들 중 가난했던 사람은 오직 작은 아씨들의 조 뿐인 듯했다. 그러나 곧이어 그 생각은 바뀌었다. 영화 속 에이미가 말했듯 여성은 재산을 소유할 수도 없고, 재산이 있어도 결혼을 하는 즉시 모든 재산이 남편에게 귀속되는데, 이런 사회적 규율 속에서 여성 작가들이 진정으로 부유하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어쨌든 이들이 머물렀다고 알려진 집과 방을 보면서, 여자가 혼자 글을 쓰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방’과 ‘500파운드’가 꼭 필요하다던 버지니아 울프의 말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된 것은 사실이다.
루이자 메이 올콧의 '오차드 하우스' ⓒ Louisa May Alcott's Orchard House / Victoria Magazine
"돈은 누구나 갖고 싶은 것이지만 가난도 장점이 있다. 가난의 장점 중 하나는 머리나 손으로 열심히 일한 대가를 거머쥐었을 때 느낄 수 있는 진정한 만족감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현명하고 아름답고 유용한 것들의 절반은 모두 가난 속에서 필요에 의해 탄생했다. 조는 그런 만족감을 즐길 줄 알게 되면서 부유한 여자들을 더는 부러워하지 않았다. 원하는 것을 자신의 힘으로 얻고, 남에게 경제적으로 의지하지 않고 살 수 있게 되면서 마음에도 큰 위안이 됐다."
미국 매사추세츠주 콩코드에 위치한 ‘오차드 하우스(Orchard House)’는 <작은 아씨들>의 저자 루이자 메이 올콧(Louisa May Alcott, 1832-1888)의 집으로, 현재는 그녀와 작은 아씨들을 위한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올콧 가족 중 베스의 모델이 된 여동생 엘리자베스(Elizabeth)를 제외한 모두가 1858년부터 1877년까지 이 집에서 살았다.엘리자베스는 안타깝게도 소설처럼 올콧 가족이 이 집으로 이사 오기 불과 몇 주 전 사망했다고 한다. 경제적으로 아주 풍족하지는 않았던 듯하지만, 가족들과 다 함께 살았던 만큼 생활하기에는 충분했고 거기에 아버지가 직접 만들어주신 자기만의 집필 공간이 있었으니 루이자에게는 글을 쓸 수 있는 모든 조건이 충족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그녀는 이곳에 살면서 1868년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소설 작은 아씨들을 쓸 수 있었다. 이 책이 성공하면서 루이자는 마침내 혼자 힘으로 살 수 있는 경제력을 가졌고, 독립하는 막냇동생을 위해 집도 사주었다. 이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그녀는 아버지와 함께 오차드 하우스를 팔고 막냇동생이 있는 보스턴 집으로 옮겨가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그녀의 오차드 하우스는 영화 속 마치 가족의 집과 거의 똑같은 모습이었는데, 실제 루이자 역시 소설 속 조와 매우 흡사한 삶을 살았다고 알려져 있다. 소설 속 배경과 등장인물, 사소한 에피소드 하나하나가 모두 그녀의 삶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다른 점이 있다면 그녀가 조와 달리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 정도일 것이다. 여담으로 루이자는 조가 베어린 교수와 결혼했다는 소설의 결말을 매우 싫어했는데, 영화에서 재치 있게 각색한 것처럼 당시 소설이 팔리기 위한 경제적인 타협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루이자가 작은 아씨들의 성공으로 경제적인 여유를 가질 수 있었던 것 역시 그녀의 재산을 빼앗아버릴 남편이 없었기 때문이다.
조지 엘리엇의 '홀리 로지' ⓒ MyLondon
"우리가 이 땅을 이토록 사랑할 수 있음은 이 땅에서 보낸 유년 시절 때문이며,
자그마한 손가락으로 따던 그 꽃들이 봄마다 이 땅에서 다시 피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가, 모든 것이 자명하고 자명하기에 사랑받는 이 달콤한 단조로움은."
영화 속 조는 해변에 드러누워 베스에게 조지 엘리엇의 <플로스 강의 물방앗간>을 읽어준다. 이 책을 집필한 조지 엘리엇(George Eliot, 1819-1880)의 진짜 이름은 메리 앤 에반스(Mary Ann Evans)다. 19세기와 그 이후까지도 우리는 필명을 남자 이름으로 한 여성 작가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녀는 동시대 다른 어떤 여성보다 과감하고 파란만장한 삶을 산 것으로 유명하다.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유부남과의 동거, 아버지를 충격에 빠뜨린 신에 대한 부정, 60세의 나이에 20살 연하의 남자와 올린 충격적인 결혼 등 그녀의 인생관은 당시에는 받아들이기 힘들 만큼 대단히 놀랍고 시대를 앞서는 것이었다.
조지는 이전부터 꾸준히 신문사에 글을 기고하고 있었지만, 본격적인 소설을 써보기로 한 것은 비교적 늦은 나이인 37세 때였다. 초창기 글을 쓰던 시기에 그녀는 상당한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었다. 다른 이들에 비해 원고료를 많이 받는 편이었지만, 원고료 자체는 생활을 유지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액수였고, 무엇보다 그녀의 논란 속 동거인이었던 유부남 조지 루이스(George Lewes)의 벌이가 모두 그의 법적 부인에게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녀의 원고료 역시 사실상 조지 루이스의 소유였는데, 그는 그 돈마저 부인에게 주고 있었다. 다행히 그녀의 첫 장편 소설 <아담 비드>가 놀라울 만큼 성공하면서 그녀는 금세 경제적인 여유를 확보할 수 있었다.
1859년부터는 전업 작가를 결심하고 조지 루이스와 함께 영국 런던시 윔블던 파크(Wimbledon Park)에 위치한 홀리 로지(Holly Lodge)라는 이름의 아파트로 옮겨갔다. 그곳에서 쓴 그녀의 두 번째 소설이 바로 1860년 발표한 플로스 강의 물방앗간이다. 루이자 메이 올콧에게 작은 아씨들이 자전적인 소설이었던 것처럼, 조지 엘리엇에게는 플로스 강의 물방앗간이 자신의 삶을 투영한 자전적인 소설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소설 속 매기(Maggie)의 아버지처럼 물방앗간을 소유하고 있었고, 조지는 소설 속 매기처럼 굉장히 영특했지만 결혼할 만큼 예쁘장하지는 않은 여자아이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는 달랐다. 당시에 여성들에게는 거의 주어지지 않았던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면서 조지의 아버지는 그녀가 공부를 계속할 수 있도록 아낌없이 지원했다. 그녀는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그와 함께 살며 유일하게 아버지의 뜻만은 거스르지 않으려고 애썼다고 한다.
조지 엘리엇은 이곳 홀리 로지에서 겨우 1년밖에 살지 않았다. 그녀가 금세 작가로 유명해지면서 런던의 아파트는 너무나 시선이 집중되던 것이다. 그녀가 잠깐 살았던 이 아파트는 여전히 윔블던 파크에 자리해 역사적 인물이 살았음을 증명하는 런던시의 블루 플래그를 달고 있다. 비록 2층 조지의 ‘자기만의 방’은 이제는 당시의 모습을 만나볼 수 없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변화를 거듭한 덕분에 현재까지도 이곳은 누군가가 살아가는 공간으로 유지될 수 있었다. 이곳에서 또 다른 조지 엘리엇이 탄생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브론테 자매(샬롯, 앤, 에밀리)의 목사관 ⓒ KNS news / JEFF GREENBERG / GETTY IMAGES
"세상의 모든 기쁨이 내게 주어지지 않거나 그것이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가격으로 주어진다면,
나에게는 내가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던 마음 속 보물이 있고, 그 보물이 날 살아있게 해줄 것이다."
한편 조가 아픈 베스를 돌보는 동안, 막내 에이미는 유럽에서 로리와 함께 예술적 소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자신을 ‘애매한 재능’이라고 표현하는 에이미에게 로리는 이 세상에 천재라고 불리는 여자가 있기는 한지 질문을 던진다. 에이미가 떠올렸던 천재적인 여성은 바로 위대한 브론테(Brontë) 자매, 샬롯(Charlotte, 1816-1855), 에밀리(Emily, 1818-1848), 앤(Anne, 1820-1849) 브론테였다.
아버지가 목사였기 때문에 브론테 자매가 살았던 집은 영국 웨스트요크셔주 하워스에 위치한 허름한 목사관이었다. 지금은 브론테 가족을 위한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는 이곳에서 세 자매는 언제나 함께였다. 앤이 잠시 선생님으로 일하기 위해 집을 떠났던 시기를 제외하고는 셋은 평생 이 집에 살면서 같이 공부하고, 새로운 도전을 하고, 다같이 글을 썼다.
조지 엘리엇과 마찬가지로 이들 역시 성별로 인한 불이익을 피하고자 각각 커러(Currer), 엘리스(Ellis), 액턴(Acton) 벨(Bell)이라는 남성적인 필명을 사용했다. 1846년 세 명이 쓴 시를 한데 모아 대망의 첫 책을 출간했는데, 마땅한 출판사를 찾지 못해 자신들이 직접 자금을 충당해 책을 만들어야 했다. 첫 시집은 고작 2부 판매라는 충격적인 실적을 남기며 실패에 그쳤지만, 브론테 자매는 좌절하지 않고 다음 책을 위한 준비를 해나갔다. 이듬해 1847년 자매들은 마침내 세계 문학사에 길이 남을 대작을 출간하게 되는데, 샬롯의 <제인 에어>, 에밀리의 <폭풍의 언덕>, 앤의 <애그니스 그레이>가 바로 그것이다. 이 세 소설이 모두 대성공을 거두며 브론테 자매는 벨 형제라는 필명 아래 순식간에 문학계의 대스타가 된다. 이어서 1848년 발표한 후속작 샬롯의 <셜리>, 앤의 <와일드펠 홀의 소작인> 역시 큰 인기를 끌었다.
브론테 자매에게 ‘자기만의 방’은 있었을지 몰라도, 걱정 없이 글을 쓸 수 있도록 해줄 돈 ‘500파운드’는 허락되지 않았다. 세 자매는 평생 지독한 가난에 시달렸는데, 원래도 풍요롭지 못한 가문인 데다 아버지는 벌이가 거의 없었고 어머니마저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다행히 세 자매는 모두 적절한 교육을 받아 공무원이나 선생님으로 일할 자격이 있었다. 생계를 위한 일을 병행하며 이들은 계속해서 글을 써나갔고, 마침내 2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빠르게 작가로서 성공할 수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 중 결혼한 사람이 오직 샬롯 뿐이라는 사실이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샬롯을 제외한 에밀리와 앤이 모두 이른 나이에 요절한 탓이 크다. 샬롯은 동생들이 죽고 한참 뒤인 1854년 결혼했다. 19세기 가난한 집안에서 여성으로 태어나 남편 없이 생계를 책임지며 글을 썼을 브론테 자매를 생각하면 이들이 얼마나 고생스러운 길을 걸었을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버지니아 울프의 '몽크스 하우스'와 별채 ⓒ WALLS WITH STORIES
"지적 자유는 물질적인 것들에 달려 있습니다. 시는 지적 자유에 달려 있지요.
그리고 여성은 그저 이백 년 동안이 아니라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언제나 가난했습니다.
여성은 아테네 노예의 아들보다도 지적 자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여성에게는 시를 쓸 수 있는 일말의 기회도 없었던 거지요. 이러한 이유로 나는 돈과 자기만의 방을 그토록 강조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작은 아씨들과는 관련이 없지만, 이 글의 주제가 된 <자기만의 방>을 쓴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 1882-1941)의 이야기다. 버지니아는 영국 이스트서식스주 로드멜에 별장 몽크스 하우스(Monk’s House)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결혼 초반 남편과 함께 700파운드에 이 집을 샀는데, 집에 대한 애정이 상당해 몽크스 하우스라는 이름까지 그녀가 직접 붙였다고 전해진다. 이들은 평소에는 런던의 집에 머무르고 틈틈이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점점 그 시간이 길어져 1940년부터는 런던을 완전히 떠나 몽크스 하우스에 정착하게 되었다. 버지니아는 마지막 날까지 이 집에 머물다 1941년 집 근처 우즈강에 투신해 자살(추정)로 생을 마감했다.
몽크스 하우스 속 마당에 자리잡은 작은 별채는 버지니아의 수많은 소설들이 탄생한 그녀의 집필실이다. 버지니아에게 ‘자기만의 방’은 말 그대로 몽크스 하우스에 위치한 이 별채였다. 오롯이 글쓰기에만 집중할 수 있는 곳, 자신에게 에너지를 쏟아부을 수 있는 곳에서 그녀는 1929년 소설 자기만의 방을 쓴다. 이 책에서 그녀는 바로 그 유명한 “픽션이나 시를 쓰려면 일 년에 500파운드의 돈과 문에 자물쇠를 채울 수 있는 방이 필요하다”는 말을 했다.
버지니아에게는 ‘자기만의 방’과 함께 또 한 가지, 분명한 액수의 돈 ‘500파운드’가 있었다. 실제로 그녀의 고모의 유산으로부터 매년 500파운드를 지급받은 것이다. 그녀는 글을 쓰고자 하는 여성들에게 돈, 특히 남편에게 받는 돈이 아닌 1페니라도 오롯이 자신의 소유인 ‘자기만의 돈’이 얼마나 소중한지 강조했다.
버지니아 역시 유산을 물려받기 전까지는 결코 평탄하지 못한 삶을 살았다. 스스로에 대해 “대가족 속에서, 가난하지만 잘 처신하는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고 표현했을 만큼 그녀의 친정은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했기에 그녀는 봉투에 주소 쓰기같이 하찮은 부업부터 노인의 시중을 드는 일, 유치원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 등 생계를 위해서라면 닥치는 대로 아무 일이나 해야 했다. 그런 그녀에게 어느날 고모가 남긴 연간 500파운드는 비록 큰돈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놓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생활을 유지해야 한다는 책임에서 벗어나자 마침내 그녀는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글을 쓰는 여성 작가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바로 집과 돈이다. 그러나 19~20세기에 여성이 혼자 힘으로 이 둘을 모두 마련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글에서 소개한 여성들은 모두 작가라는 꿈을 좇기 위해 주거나 생활 측면에서 가족으로부터 경제적인 힘을 빌려야 했고, 이들이 비로소 돈으로부터 자유로워져 글쓰기에만 집중할 수 있었던 시기는 결국에는 문학적으로 성공을 거둬 인세를 받을 수 있게 된 이후였다. 다만 현재에도 많은 성공한 작가들이 인세만으로 생활이 되지 않아 생계를 위한 일을 병행한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이들이 성공 이후 진정한 자유를 찾을 수 있었는지는 확신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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